남원시 금지면 입암리 당산제와 달집태우기 행사!
금지면 입암리는 제일 높은 곳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동학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이곳에 '홍북단'이란 단을 모아 당산제를 성대하게 지내왔고 2014년 2월 13일과 14일에 주면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당산제와 달집태우기 행사를 성대하게 치럿다.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 마을은 1910년대 부터는 5백여 두락의 밭에 목화를 재배하여 남원관내에서는 제일 많은 생산을 했으며 1965년에는 집단뽕밭을 조성하여 높은 소득을 올려 마을전체가 잘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마을은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려는 형상으로 학이 날아가 버리면 마을이 흥하지 못해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고 학의 날개 부분(당산근처)과 머리(서매리로 가는 길목) 학의 눈을 상징하는 부분에 바위들이 있어 학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 주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들이 옛날부터 자연적으로 형성 되었기에 마을이 부유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1919년 3. 1만세운동에 참여한 방극용(房極鏞) 열사의 기적비를 마을 앞 도로변에 건립하여 선열의 애국심을 기르고 향토의 우국충정을 고무 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그 곁에는 장수황씨 삼세 효열 기적비가 세워져 있고 마을앞 동산에는 평산 신씨 양세 효행기적비가 각각 건립되어 있으며 밀양박씨 전주사 시혜비, 충 주 지씨 효자정각비, 진주강씨 열부 기적비가 각각 건립되어 있다.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는 당초 관암리(冠岩里)라 했다가, 1920년 2년간의 흉년을 만나자 마을 사람들이 관(冠)자와 뜻이 같은 삿갓 입(笠)자로 바꾸어 입암(笠岩)으로 개칭하였다.
현재의 마을 동쪽 두적(斗跡)이라는 삼밭 자리에 임진왜란 이후 문씨(文氏), 지씨(池氏), 황씨(黃氏) 등이 거주하다가 지금의 위치로 마을을 옮겨왔다. 그 후 박씨(朴氏), 신씨(申氏), 안씨(安氏), 김씨(金氏), 엄씨(嚴氏), 배씨(裵氏) 등의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뤘다.
1972년 마을을 입동리와 입서리로 분리하였다. 조선시대 선조 이전에 지금의 마을에 큰 사원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마을의 총 면적의 경우 입동리는 135㏊, 입서리는 103㏊이다. 입동리의 경지 면적은 69㏊로 밭 10㏊, 논 59㏊이고 임야는 3㏊이다. 입서리의 경지 면적은 67㏊로 밭이 11㏊, 논이 56㏊이다.
산업 구조로는 농림업이 95% 이상이고 기타업이 5% 정도이다. 주요 산업으로는 쌀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1990년대부터 딸기, 포도의 시설 원예를 하여 지금은 높은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