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연산 땅에 돈암서원이 창건되기 이전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1557년(명종 12) 연산 대둔산(大屯山) 고운사(孤雲寺) 경내에 정회당(靜會堂)을 설립해 후학 양성과 향촌 교화에 전념하였고, 김장생은 1602년(선조 35) 연산으로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양성당은 김장생을 따르고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이 모여 강학하던 서재이다. 1660년(현종 1)에 '돈암(遯巖)'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원래는 김장생이 살던 곳에 건립되었다가 1880년(고종 17년) 홍수로 인해 1.5㎞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구한말 혼란한 시기인지라 완전 이전이 되지 않은 채 명맥만 유지하다 본당에 속하는 凝道(응도)당은 1970년에 와서야 문화유적 복원 차
연산 땅에 돈암서원이 창건되기 이전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1557년(명종 12) 연산 대둔산(大屯山) 고운사(孤雲寺) 경내에 정회당(靜會堂)을 설립해 후학 양성과 향촌 교화에 전념하였고, 김장생은 1602년(선조 35) 연산으로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양성당은 김장생을 따르고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이 모여 강학하던 서재이다. 1660년(현종 1)에 '돈암(遯巖)'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원래는 김장생이 살던 곳에 건립되었다가 1880년(고종 17년) 홍수로 인해 1.5㎞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구한말 혼란한 시기인지라 완전 이전이 되지 않은 채 명맥만 유지하다 본당에 속하는 凝道(응도)당은 1970년에 와서야 문화유적 복원 차원에서 이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배치 상태가 엉망이었다.
원에서 이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배치 상태가 엉망이었다.
정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뒷면 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었고, 바닥에는 전을 깔았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내부에는 모두 마루를 놓았다. 무고주 5량가 구조이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마재는 양성당 동쪽 측면에 ‘ㄱ’자 형태로 있고, 사마재를 에워싸는 담이 둘러져 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수직사는 동쪽 담을 둘러친 별도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남쪽 1칸은 부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을 두었고, 북쪽 측면에는 퇴칸을 두었다. 온돌방 앞면에는 퇴칸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마루는 우물마루로 짰다.
광산김씨는 연산 지역에서 세거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호서 명문 사족가문이다. 이런 이유로 돈암서원은 서인-노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1871년 서원 훼철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특히 김장생이 타계한 후 제자와 문인들이 만든 돈암서원책판(遯巖書院冊版)이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다.
이렇듯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은 물론 기호 지역 전체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에서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까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서도 보존적 가치가 높다. 나아가 호서 지역 사림의 동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당시 실질적인 세력권자인 김장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 라는 묵서가 있는 측면전신좌상은 1744년 작품으로, 『영당기적』에 ‘崇禎紀元後, 再甲子四月, 影子移摹四本, 正面一仄面三. 畵師張敬周’라고 밝혀져 있어 장경주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崇禎紀元後三戊申二月摹’라는 묵서를 지닌 1788년작 윤증초상 2점은 『영당기적』의 내용을 통해 이명기가 모사했음을 알 수 있다. '영당기적'에 따르면 정면 1본과 측면 1본은 신법을 가미하여 그리고, 구본의 화법을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구법을 따라 측면 1본을 그렸다(故倣甲子正面點化之例, 略加新法, 摹出正仄各一本, 而舊本畵法, 亦不可不傳於後. 故又出仄面一本, 純用舊摸法)고 한다. 이명기가 제작한 현전하는 초상화 2점은 장경주 필 윤증상과 그 모습이 흡사한 구법에 따라 그린 측면상과 이명기의 개성적 화풍으로 그린 입체표현이 선명한 신법의 측면상이다. 정면과 측면의 흉상 2점은 화면에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추정된다. 측면상을 전신상과 비교해 보면 크기나 기법이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와 같다.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영당기적』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 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제작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윤증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장경주와 이명기가 그린 <윤증초상>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회화적 격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성을 지닌다. 아울러 '영당기적'은 초상화 제작과 이모과정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로 지정 예고된 이들 작품 외에도 종가에는 1919년 및 1935년작 전신좌상 및 소묘초본이 여러 점 전하고 있다.

2013년 7월 6일 토요일부터 7일 일요일까지 한문화재 지킴이 전국대회가 대전에서 열렸다, 이곳에 참여하신 南原 (사) 전통문화 보존회 이사장 李啓錫, 회원 만인의총 지킴이 임미순, 회원 만복사지 지킴이 김정진, 유말순 이백석불입상 지킴이 등 전국에서 250여명이 관광뻐스 5대로 이곳을 찻았으며 다른 곳에는 문화재 주변등에 많은 돈을 드려 볼수 있도록 만둘었다,
|